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디지털 노마드의 방랑일기

상관없는 거 아닌가? - 장기하 산문 [도서] 본문

도서

상관없는 거 아닌가? - 장기하 산문 [도서]

디지털 방랑자^--^* 2024. 1. 12. 15:45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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장기하 산문

상관없는 거 아닌가? 책 표지와 목차

교보문고

책 내용 중에서

아무것도 안 하기

크리스마스이브날 조금은 특별한 계획을 세웠다.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것이다.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, 나는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다. 집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. 어제 아는 동생에게 오랜만에 안부 전화가 왔다. 크리스마스에 무얼 할 계획이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. 어느 정도 예상한 바지만 그는 왜 크리스마스마스에 '외롭게' 혼자 보내겠다는 거냐고 되물어왔다. 아마 크리스마스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보내는 사람에 대해 외롭겠다고, 혹은 안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. 의도치 않게 집에만 있게 된 경우, 자신의 처지를 처량히 여기는 이들도 꽤 많을 것이다.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괜찮다. 아니, 아주 좋다. 이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. 나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. 물론 뭔가 재미있는 걸 하면서 역동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좋아하지만,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기 역시 내 삶의 원동력 중 하나다. 

 

아무것도 안 하기, 사실 어려운 일이다.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혼자 있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. 작정하고 휴일을 만들어 쉬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.  

내가 의미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란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과 안으로부터 솟는 의지, 이 두 가지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. 내가 뭔가를 보거나 듣고 있다 해도 그것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. 그리고 그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. 그런 상태가 되면 내 안에 있는 것이든 밖에 있는 것이든, 그 무엇과도 교류하지 않게 된다. 내 뇌는 마치 텔레비전처럼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이 장면 저 장면을 이어나가고, 내가 인식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. 장황하게 설명했지만, 시쳇말로 '멍 때리는' 상태란 얘기다. 

 

내가 이런 상태를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서지만,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 창작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. <싸구려 커피>의 중간 랩 부분을 만들 때 나는 정확히 그런 상태였다. 참 생생한 기억이다.

 

군인이었던 나는 휴가를 나와 군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. <싸구려 커피>의 노래 부분은 일 년여 전에 만들어놓고 있었다. 원래는 중간 부분에 기타 솔로 정도를 넣을 셈이었다. 그런데 그 휴가로부터 얼마 전, 그 부분에 입말에 가까운 무언가를 넣으면 훨씬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. 버스 창밖으로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, 무심히 그걸 바라보다가 이윽고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. 그야말로 멍한 상태였다.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저런 단어들이 알아서 모여들었고 각기 이 박자 저 박자에 달라붙어 가사가 되어갔다. 마치 애니메이션 <판타지아>에서 마법사가 잠든 동안 빗자루들이 알아서 물을 길어 오는 것처럼, 그 어휘들은 내 의지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. 

 

결과물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. 반응도 좋았다. 그날 만든 그 부분이 결과적으로 장기하라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정체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. 여러모로 나의 창작자로서의 삶에 있어 어떤 중요한 원형이 되어준 사건인 것이다. 이후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새로운 작곡은 늘 그와 비슷한 상태일 때 시작됐다. 그래서 꾸준히 그 상태를 추구해 왔고,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.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은, '추구'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한 대상이 아니다. 추구한다는 건 어떻게든 '노력'을 한다는 뜻인데, 노력이란 아무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는 상극이지 않나. 한마디로 나는 바라면 바랄수록 멀어지는 것을 바라온 것이다. 그래서인지,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'상관없다'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갖게 됐다. 아무것도 안 하고 '싶다'든지 아무것도 안 해야'된다'라고 생각하면 상황은 점점 불리해진다. 아무것도 안 해도 상관없고, 또 뭔가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. 오늘도 아무것도 안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. 이 책을 쓰기 시작한 후에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곡이나 글이나 아무것도 안 할수록 잘 써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.

 

나의 이런저런 생각.

아무것도 안 하기.

쉽지 않다. 아무것도 안 하려면 마음을 비우고 급하지 않아야 한다. 가만히 있는 것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. 요즘 방학시즌이라 일이 별로 없다. 방학시즌에 이런저런 공부를 해야지 했는데 너무 거창했는지 시작도 못했다.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다. 분명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. 나는 어디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가. 비싼 노트북으로 부업한다고 해놓고 유튜브를 보기 시작하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보낸다. 멍하니 있지를 못하고 밥 먹을 때도 시간 아깝다고 유튜브를 본다. 하하. 

 

장기하 말처럼 멍하니 멍 때리는 것도 잠깐은 해도 긴 시간 멍 때리기 참 어렵다. 멍 때리다 보면 온갖 잡생각이 다 들다가 어느 순간 환상 속의 그대처럼 뭔가 팍 하고 이거다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. 아마도 장기하는 이것을 말하는 것 같다. 그래 나도 있었다. 이런 순간이. 인터넷이 발달되고부터는 정말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쳐 허덕이는 것 같다.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더 힘들고 내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닌 정보들. 그래서 나도 블로그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 것을 만들어 보자에서 시작된 것 같다. 일기같이 쓰는 글이지만 나도 좋고 함께하면 더 좋고^^ 그냥 다 남겨서 내 것을 만들기로 했다.